빅토르 위고의 "레 미제라블"
책 중에는 한번 읽고 마는 것이 있는가 하면, 인생의 주기에 따라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는 것이 있다. 별다른 놀 거리가 없었던 60년대 초의 국민학교 학생에게 ‘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’은 실로 커다란 선물이었다. 그 가운데 “아아! 무정”이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. 일본어 판에서 중역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이 바로 “장발장”이라고도 불리우는 “레 미제라블”이었다. 당시 수없이 반복하여 읽은 이 책은 어린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. 미리엘 신부의 은촛대 사건이나 자벨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 장발장의 행동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행동으로 느껴졌다. 어둡고 무서운 숲속의 우물에서 코제트의 무거운 물동이를 들어 주는 장발장의 모습에서는 기대고 싶은 구원자의 모습이, 테나르디에에게서 위엄있게 코제트를 데려오는 장면에서는 통쾌함이 느껴졌다.
이 책의 인물과 행동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. 대학에 들어가 보니 한 선배는 “좋은 책은 나이에 따라 10년 주기로 다시 읽어야 한다”며 “카라마조프”를 읽고 있었다. 다른 많은 선배들은 고시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의 자기 자리에 “너는 해야 하므로 할 수 있다(Du kannst, denn du sollst)”라는 칸트의 명제를 써 붙여 놓고 있었다. 그렇지만 이 명제에 대하여는 의문이 앞섰다. 과연 그럴까? 할 수 있으니까(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)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?
선배를 따라 다시 보기로 결심한 책이 이 책(완역판)이었다. 다시 읽어 보니 이 책은 어린 시절 읽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. 이 책의 원전은 생각보다 긴 호흡의 것이었으며, 소설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많은 역사와 문화비평적인 내용이 들어 있었다. 팡틴이 머리채, 치아 뿐 아니라 몸까지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. 미리엘 신부가 작성한 금전출납부를 통해서 당시의 삶의 모습들도 알 수 있었다. 결정적인 것은 이 책을 통해서 당시 의문을 가졌던 칸트의 명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(사실 이 깨달음은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읽을 때 얻은 것이다). “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”는 말을 이미 위고는 그 책에서 생생하게 ‘보여 주고’ 있었던 것이다. 미리엘 신부는 애지중지하는 은촛대와 은식기를 이 불한당에게 내 준다. 장발장은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장 마티유가 체포되어 처벌받게 되자, 당시 시장이라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벨의 집요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재판정에 출석하여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자백한다. 인간이 인격체로서 ‘의무의식 그 자체의 발로로서’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위고는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. 이를 통해서 위고는 장발장이 본능과 환경에 따라 사는 조야한 한 인간에서 ‘하나의 인격체’로 거듭 났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.
장발장은 고의로 범죄를 저질렀고, 과실(부주의한 감독)로 팡틴을 해고함으로써 그녀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다. 그래서 그는 벌을 받았고, 코제트를 거둠으로써 그 죄책의 부담을 떠안았다. 그렇지만 그는 미리엘 신부로부터 구원의 실마리를 얻었으며 스스로 자각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.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도 하였다. 코제트와 마리우스에 대하여.
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사랑을 쏟았던 사람으로 부터의 작별이 기다리고 있었다. 코제트에 대한 사랑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일이 그것이다. 그렇지만 그는 깨닫는다.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.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.
짧은 호흡의 책에 익숙해져 있는 오늘날 짙은 색조의 루오의 그림과도 같은 묵중한 책을 손에 잡고 도전해 보는 것도 이 가을에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?